2022. 12. 7. 08:30ㆍ1일N곡
풀 무덤에 새까만 앙금 모두 묶고
마음엔 한껏 꽃 피워
봄 맞으러 가야지
올해로 데뷔 25주년을 맞은 자우림은 감정 기복이 심한 밴드이다.
괄괄하고 신나는 <하하하쏭> <Hey Hey Hey> <매직 카펫 라이드> <Carnival Amour> 같은 곡이 있는가 하면, 음울한 감성을 한껏 끌어올린 <나사> <You And Me> <낙화> <새>도 있고, 여린 청춘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그려낸 <샤이닝>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스물다섯 스물하나>, 심지어 코믹한 <이런 데서 주무시면 얼어죽어요> 같은 곡까지, 하나의 밴드가 내놓은 곡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컨셉의 곡들을 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울과 행복의 양 극단을 오가는 곡들을 다수 히트시켰다는 점이다.
2010년대 초반까지 자우림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신나는 음악을 하는 펑크 밴드"였다고 생각한다. 자우림의 데뷔곡인 <Hey Hey Hey>부터 1집 앨범의 타이틀곡 <일탈>, 자우림 최고의 메가히트곡인 정규 3집의 <매직 카펫 라이드>와 CM송으로 쓰이면서 큰 사랑을 받은 <하하하쏭>등, 자우림의 대표곡들이 대부분 신나는 곡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밴드 자우림을 프론트우먼인 김윤아와 동일시한다. 김윤아가 자우림의 보컬이면서, 작사와 작곡 상당수를 담당하고 있을 뿐더러, 다른 멤버들보다 적극적으로 방송 활동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SNL의 자조적인 꽁트에서는 한 무리의 여고생들이 김윤아를 '우림 언니!' 라고 부르며 사인을 해달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프론트우먼인 김윤아의 솔로 음반은 자우림의 스타일과는 많이 다르다. 앞서 자우림이 얼마나 다양한 컨셉을 시도했는지 언급했지만, 김윤아의 솔로 음반은 자우림으로서 시도했던 다양한 컨셉들과도 다른 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솔로로 작업할 때는 제가 여자라는 의식을 하지만, 팀 작업할 때는 무성(無性) 생물이 돼요. 남성도 여성도 아니고 연령도 없는 존재 말이에요. 그리고 굉장히 하이(High)해지죠.” (링크)
김윤아의 솔로 음반들을 지배하는 감성은 멜랑콜리다. 내밀하고 짙은 외로움을 드러내는 곡이 많지만 때로는 교태로운 탱고를 부르기도 한다. 밴드 사운드를 벗어나 피아노 반주를 적극적으로 채용하는 것도 두드러지는 차이점 중 하나다. 솔로 가수로서의 김윤아와 자우림의 프론트우먼 김윤아의 대비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곡이 바로 김윤아의 솔로 2집 앨범 <유리가면>의 수록곡, <봄이 오면>이라고 생각한다.

<봄이 오면>은 특이하게 같은 가사의 곡이 서로 다른 반주를 곁들인 두 가지 버전으로 하나의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6번 트랙으로 기타 반주 버전과 (이하 봄이 오면 G), 9번 트랙으로 피아노 반주 버전을 (이하 봄이 오면 P) 실었다. 이런 구성은 솔로 1집 <Shadow of Your Smile>의 타이틀곡 <담>에도 적용된 방식이다. <담>도 같은 앨범에 두 가지 버전이 실려 있다.
<담>의 String 버전은 단순히 변주곡을 B-Side에 실어주는 느낌이었다면, <봄이 오면>은 앨범 안에서 감정의 변화를 표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병우의 어쿠스틱 기타 연주와 함께하는 <봄이 오면 G>는 마치 한겨울의 가장 추울 때 노래하는 것 같이 절절한 체념이 느껴진다. 봄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만 봄이 오면 이루고 싶은 간절한 것들을 노래한다.
7번 트랙 <Melancholia>와 8번 트랙 <미저리>에서는 우울한 감정이 더더욱 고조된다. 그리고 9번 트랙 <봄이 오면 P>는 이 앨범의 카타르시스가 된다. 피아노 연주와 함께 겨울의 끝,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할 때 처럼 엷은 희망과 함께 봄이 오고 있다는 확신이 느껴진다. 이제 김윤아는 봄이 올 것을 알고 있고, 봄이 오면 해야만 하는 것들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나룻배에 가는 겨울 오는 봄 실을" 그 때를 노래하고 있다.
가사를 꼭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한 줄 한 줄 정제된 가사가 대단히 시적이다.
봄이 오면
하얗게 핀 꽃 들녁으로
당신과 나 단 둘이
봄 맞으러 가야지
바구니엔 앵두와 풀꽃 가득담아
하얗고 붉은 향기가득
봄 맞으러 가야지
봄이 오면
연두빛 고운 숲속으로
어리고 단비 마시러
봄 맞으러 가야지
풀 무덤에 새까만 앙금 모두 묶고
마음엔 한껏 꽃 피워
봄 맞으러 가야지
봄바람 부는 흰 꽃 들녘에 시름을 벗고
다정한 당신을 가만히 안으면
마음엔 온통 봄이 봄이 흐드러지고
들녁은 활짝 피어나네
봄이 오면
봄바람 부는 연못으로
당신과 나 단 둘이
노저으러 가야지
나룻배에 가는 겨울 오는 봄 싣고
노래하는 당신과 나
봄 맞으러 가야지
노래는 단순히 시에 음률을 붙인 것이 아니다. <봄이 오면 G>에서 <봄이 오면 P>는 같은 노랫말을 써서 반주와 창법을 다르게 하여 아주 섬세한 감정의 변화를 담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어쩌면 가사가 같기 때문에 더욱 의도가 잘 전달되었다고 생각한다.
가사와 어울리는 곡도 많고, 가사와는 동떨어진 곡도 많으며, 애초에 가사가 의미가 없는 곡도 있다. 이 두 곡은 가사를 통한 감정 전달의 끝을 보여주고 있다. 악기 하나로만 구성된 반주에 김윤아의 노래로 완성된 곡들인데, 마치 재료의 맛을 잘 살린 음식처럼, 곡이 가진 완성도를 꾸밈 없이 보여주는 곡들이라고 생각한다.
봄이 오면 하고 싶은 일들을, 하지만 할 수 없기에 더 담담하게 읊조리는, 숨막히게 슬픈 곡에서,
봄이 오면 해야만 할 일들을, 반드시 해내기 위해 기대를 품고 읊조리는, 희미한 희망을 품은 곡으로.
<유리가면>은 솔로 아티스트 김윤아의 역량을 음미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음반이다. 자우림이 아닌 김윤아의 음악 세계를 옅보고 싶다면 <봄의 오면 G> 와 <봄이 오면 P>의 미묘한 대비를 느껴보기를 추천한다.
* 2017년 4월 19일 포스팅을 수정하여 재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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