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gur Rós - Olsen Olsen (1999) (가사 없음!)

2022. 12. 6. 19:191일N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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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사랑하는 멜로파일들이 쉽게 빠지는 함정 중 하나는, 좋아하는 음악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마음에 드는 음악을 찾으면 아티스트의 배경부터 곡의 가사, 쓰인 악기와 구성까지 찾아보며 '내가 이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를 찾게 된다. 꼭 음악뿐만이 아니라 음식, 미술, 공연, 사진 등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가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를 절박하게 찾고는 한다.

하지만 좋은 음악을 즐기는데 필요한 것은 두 귀 말고는 없다. 애초에 음악의 좋고 나쁨을 정하는 것은 오롯이 듣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Ethereal

아이슬란드의 포스트 록 밴드 시규어 로스 (Sigur Rós) 혹은 시귀르 로스는 아이슬란드의 자연처럼 차갑고 맑으면서, 신비롭고 장엄한 음악을 들려준다. 이들의 초기 음악을 흔히 "Ethereal" 하다고 표현한다. 이는 우리말로 옮기기 쉽지 않은 단어이다. 부서질 듯 정교하고, 날아갈 듯 가벼운, 신비롭고 신성한 느낌을 일컫는다. 시규어 로스의 음악에는 새벽 동에 녹아 없어지는 서릿발과 같은 날선 감각이 살아있다.

아이슬란드는 인구가 고작 30여만 명 밖에 되지 않지만, 세계적인 아티스트를 꽤 배출했다. 일렉트로니카의 여왕 비요크(Björk)나 밴드 오브 몬스터즈 앤 맨(Of Monsters And Men), 그리고 이 글의 주인공 시규어 로스를 꼽을 수 있겠다. 비요크와 OMAM은 메이저 데뷔 후 영어로 노래하지만, 시규어 로스는 지금까지도 한 두 곡 (All Alright 정도) 을 제외하면 아이슬란드어나 특징적인 희망어(Vonlenska)로 노래한다.

희망어(Vonlenska)는 욘시가 만든 인공어이다. 국제공용인공어를 표방한 '에스페란토', J.R.R. 톨킨이 만든 '퀘냐' 와 '신다린', SF팬이라면 알 스타 트렉 시리즈의 '클링온' 처럼 정교한 통사구조와 언어적 체계를 지니어 실제로 소통이 가능한 인공어를 생각하면 곤란하다. 사실 인공어라기보다는 재즈의 스캣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의미는 따로 없다고.

 

Olsen Olsen

이 곡 <Olsen Olsen>은 밴드의 2집 <Ágætis Byrjun> (좋은 시작) 에서 유일하게, 또 처음부터 끝까지 희망어로 불리는 곡이다. 그래서 가사가 따로 없다! 가사에서 의미를 분리하고, 욘시의 팔세토 보컬이 가진 장점을 극대화해서 악기처럼 활용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Ethereal의 정수가 바로 이 곡 <Olsen Olsen>에 녹아있다.

새벽녘 굴뚝에서 나는 연기처럼 고요하게 퍼지는 욘시의 팔세토 보컬에 이어서 드럼과 베이스가 뒤따르면서, 잠에서 덜 깬 듯 몽환적인 멜로디와 합쳐져 평화롭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마치 새벽 동이 트는 것 같은 구성을 취하고 있다. 밴드 음악으로는 독특하게 일렉기타의 현을 바이올린 활로 켜거나, 플루트와 피아노가 개입해 주제를 연주한다. 코러스와 함께 모든 악기가 들어오며 음악은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린다. 금관악기의 사운드가 아지랑이처럼 흩어진다. 도입부 욘시의 목소리같이 플룻이 주제를 독주하며 곡은 막을 내린다. 밤에서 새벽을 지나 아침 해가 뜨는 모습이 그려지는 아주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곡이다.

첫 문단에서 이야기했듯 의미 따위는 내려놓고 소리에만 오롯이 집중해야 이 곡의 맛이 산다. 가사에 어떤 은유가 있고, 뮤직 비디오에는 어떤 상징이 들어갔고, 어떤 맥락에서 나온 음악이고, 제목의 의미는 무엇이고, 그런 분석은 의미가 없다. 8분이나 되는 시간 동안 의미도 상징도 없이 소리로만 정면 승부를 걸어오는 곡이다. 하지만 북유럽의 풍광과 동트는 새벽을 상상하면서 듣다 보면 8분이 순식간에 지나갈 것이다.

 

Við munum gera betur næst
다음 번엔 더 잘할 거라고,
Þetta er ágætis byrjun
이건 좋은 시작이야

이 곡이 수록된 앨범 <Ágætis Byrjun>(좋은 시작)은 자기실현적 예언이 된 것 같다. 타이틀 곡 <Ágætis Byrjun>은 그들의 1집 Von을 추억하는 가사를 담고 있다.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지도 큰 관심을 받지도 못했지만 다음 번엔 더 잘 할 수 있을거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앨범은 평단의 극찬을 받고 글로벌 히트를 기록하며 시규어 로스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게 된다. 시규어 로스의 음악 여정에 있어 정말로 <좋은 시작>이 된 이 앨범. 최근 시규어 로스는 어둡고 메탈에 가까운 음악을 하지만, 시규어 로스 초기 음악의 목가적이고 서정적인 에테르를 느끼고 싶다면, 이 곡 <Olsen Olsen>을 차분하게 들어보기를 권한다.

새벽에 들으면 최고로 좋다!